우리나라는 의대 교육을 받고 나오면 바로 진료가 가능한 GP로 활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대 교육만으로 제대로 된 GP 펑션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의대 교육 과정을 돌이켜보면 전체적인 목차 리뷰 + 왕야마 몇개 + 기본적인 의학 용어와 해부학,
CPX+OSCE 정도가 다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실 실제 일차의료 현장에서 배우는 지식이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의대생이라고 해도 새로운 고혈압 환자의 혈압약 selection 조차
매우 매우 더듬 거리는 게 현실.
그리고 인턴이 되어서 비로소 진료 현장에 처음으로 던져져서
거기서 겨우 nursing과 관련된 지식을 귀너머로 배우고 대학 병원 체계에 익숙해지며
응급실과 서져리 계열의 주치의로서 오더 셔틀로 일하면서 주워들은 몇가지로
의사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살인적인 로딩의 전공의로서 일에 쫓기면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배워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내가 이 체계에 매우 회의를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 개고생을 해서 수련 마치고 나와도
일차 진료 현장에서 접하는 환경은 그간 배운 것과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대학병원 협진 체계, 검사 위주의 접근, 전문 과목으로의 편향된 사고 등은
일차 진료에 그닥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물론 수련 안 받은 의사보다는 환자를 다루는 기본 능력 자체는 좀 더 늘어는 있겠지.
5년간 했는데 그정도도 못하면 그야말로 바보짓 아니겠음.
(그런 점에서 공보의 3년을 다녀오는 건 의사 인생에 있어서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함...
현실과의 괴리가 어떤 건지 확실히 알 수 있고 보건지소 찾는 경한 환자들 대상으로
임상 실력 향상도 가능함... 월급 받고 일하는 로컬에서는 원장 눈치 보여서 맘대로 하기도 쉽지 않고..)
나는 중학교 때 폐렴으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오한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밤에 고열이 돼서 응급실에 갔는데 편도선염을 진단 받았고
그 후로 1주일 후에 나름 중요한 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링겔 맞고 버티다가
대회 다음날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엑스레이 찍어 보자고 해서 찍었더니 폐렴이 나와서
입원했고 그 뒤로 상당히 인생이 꼬였다.
엑스레이 찍어보자는 저 의원을 가기 전에 두세군데는 더 다녔을 거다.
뭔지 모르겠으니 약을 10개 가까이 주던 이비인후과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학교를 다니면서 항상 궁금했다. 내가 의사가 된다면 과연 저 때와 같은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일단 대답을 하자면 의대 나오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하기사, 그러니까 저런 의사들이 많았겠지. 명색이 자기네들도 전문의인데.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지금 내 실력으로 동네 환자들의 감기만이라도 잘 볼 수 있을까?
감기라는 것은 동네 의원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질환 중의 하나이다.
자주 걸리는 탓도 있겠지만
감기의 정식 명칭이 '급성 상기도 감염'이라는
두리뭉실한 이름이란 것도 이 질환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감기 증상으로 꼽히는 것들은 기침, 콧물, 발열, 인후통, 근육통 등이 있겠는데...
저 증상을 하나하나 가지치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넓은 분야를 공부할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공부꺼리를 찾다가 발견한 책이 바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감기 진단의 노하우>라는 책.
일본사람이 쓴 걸 양/한방 복수 면허자가 번역한 책이다.
(늘상 느끼는데 일본 서적은 정말 실용적인 책들이 많다. )
일본도 우리나라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를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긴 하지만
막상 감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배워본 적이 없다는 머릿말이 인상적이다.
이 책은 감기와 관련된 증상별로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할 질환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심근 경색이나 대동맥 박리와 같은 무시무시한 질병일 수도 있다는
것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뭔가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모호하고 잘 모르겠으면 무조건 감기라고
진단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보자니 정말 우리나라랑 똑같단 생각이..
특히 맘에 들었던 건 고열로 내원해서 찾아온 환자에게서 감별해야 할 질환들 파트.
응급실에 있어보면 흔히 의대에서 배우는 무시무시한 질환들은 분명히 아닌데 높은 열로 찾아오는
환자들이 상당히 많다. 아마 나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했겠지.
별 거 아니라고 돌려보냈다가 다음날 실려오게 되는 케이스들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다.
사실 우리나라는 방어적 진료 차원에서 항생제 남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 대해서 최대한 신경쓰고 언급하고 있는 것도 맘에 든다.
읽고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응급실에 갔던 때 제대로 된 의사였다면
흉부 엑스레이를 찍는 게 맞았고 설령 아직 진행 전이었다 하더라도
"아직은 편도선염과 같은 상기도 감염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열이 상당히 높고 오한 증상 등이 있기 때문에 더 진행해서 폐렴까지 갈 수 있어요.
반드시 병원 가서 나을 때까지 잘 관찰해 보세요. "
라는 이야기를 해줬더라면..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버티진 않았을 거고
어쩜 내 인생도 좀 바뀔 수 있지 않았을까.
(ER 시스템을 대충 알고 나니 그것도 불가능일 거란 생각도 든다만ㅋ 당장 밀린 환자 처리에
급급하지 뭔 추후 관리까지 신경 쓰겠나)
물론 그 다음에 찾아간 의원들도 제대로 문제를 못 찾아 냈으니
응급실 의사 탓하기 보다는 팔자 탓으로 보는 게 맞긴 하겠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소한 질환처럼 보이는 것들만으로도
남의 인생을 좌우할 수가 있단 거.
사실상 책을 핑계로 한 주저리 타임에 가깝긴 했지만...
하여튼 책이 상당히 얇고 일러스트가 허접함에도 불구하고
2만원 전혀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별 4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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